내가 변증법에 관해 이해한 바를 써 보려고 한다.
변증법에 대한 두산백과사전의 정의는 다음과 같다.
모순 또는 대립을 근본원리로 하여 사물의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
짧은 설명에 핵심은 짚었다.
하지만 지금부터는 변증법을 현실에서 출발해 이해해 보자.
자본주의는 다른 체제로 대체될 것인가
위 정의에는 ‘운동을 설명하려고 하는 논리’라고 돼 있다. 변증법은 변화를 기본 출발점으로 삼는 철학이다. 사물도 세상도 변한다는 거다.
쉬운 예를 들면, 어제의 내가 오늘의 나와 다르다는 것이다. 몸무게와 키도 다르고 생각도 다르다. 사람도 매일매일 변한다.
‘변한다’는 점을 전제하고 그걸 설명하는 게 나는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의 핵심이라고 생각한다. 세상이 변하지 않는다면 사회 운동이 필요없기 때문이다.
역으로 자본주의는 변증법을 별볼일없게 만들고 희화화한다. 자본주의는 더이상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말하고 싶어하기 때문이다.
물론 자본주의는 끊임없이 자신을 혁신하는 체제고, 어느 때보다도 변화가 극심한 체제다. 포드주의, 포스트 포드주의, 정보 사회 등 자본주의의 주요한 내부 혁신만 해도 여러 차례다.
하지만 현대 세계의 승리한 체제인 자본주의는 자신의 핵심인 시장과 임금노동, 자본간의 경쟁에서는 변화가 없을 것이라고 주장한다. 변화는 체제의 근본에 가 닿지 못하고 내부 혁신으로 제한된다.
소련과 동구권의 소위 사회주의 국가들(실상은 국가 자본주의 국가들)이 몰락하고 나서 프랜시스 후쿠야마는 이렇게 선언했다.
우리가 지금 목격하고 있을지도 모르는 것은 단지 냉전의 종식이나 전후 역사 속 특정한 시기의 경과만이 아니라, 바로 역사 자체의 종말이다. 즉, 그것은 인류의 이념적 진화의 종착점이며, 서구 자유민주주의가 인간 정부의 최종 형태로 보편화되는 것이다.
변증법의 현대적 창시자인 헤겔은 인간이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역사를 변화시켜 왔다고 설명한다. 근대 국민국가에서 인간은 신분제를 철폐했다. 인간으로 인정받지 못하던 신분들이 해방됐다. 즉, 인정받고 싶은 욕구가 충족됐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인정받고 싶은 욕구’ 때문에 생겼던 모순이 해소됐다. 그래서 헤겔은 자본주의 국가가 역사의 완성이라고 봤다. 헤겔주의자인 후쿠야마는 헤겔의 논리를 답습한 것이다.
하지만 마르크스주의 변증법은 여전히 세상이 변할 거라고 말한다.
어떻게 변하는가? – 자기모순 때문에 변한다.
변증법은 변화를 설명하는 논리다. 변화의 양상에는 여러 가지가 있다.
첫째, 외부 충격으로 인한 변화가 있다. 예컨대 천안함이 내부 모순으로 무너졌을지 외부 충격으로 폭파됐을지는 모르지만 여하간 어뢰를 맞은 배는 철조각으로 변한다.

둘째, 내부 모순에 의한 변화가 있다. 예컨대 천안함이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 균열이 가속화되면서 무너진 것(피로 파괴)으로 보기도 한다. 이 경우도 역시 두조각 난 배는 더이상 배가 아닌 것으로 변한다.

내부의 균열은 일종의 모순이다. 배는 두조각 나면 더이상 배가 아니다. 원래는 하나로 이어진 배인데, 배에 있는 균열은 배가 두조각나게 만드는 원인이 된다. 균열을 두면 배가 두조각 날 것이다. 그럼 더이상 배가 아니라 철조각에 불과하게 된다. 그렇다면 균열은 ‘배를 더이상 배가 아니게 하는 것을 지향한다’고 말할 수 있다.
- 배 – 하나다. 배다. 배를 긍정한다.
- 균열 – 두조각. 배가 아니다. 배를 부정한다.
변증법에서 중요한 것은 외부 충격이 아니라 내부의 모순이다. 배를 긍정하는 요소와 부정하는 요소(균열)는 모두 배에 포함돼 있다. 변증법이 말하는 바는 세상 만물에 변화를 향한 내부 모순이 있다는 것이다.
내부 모순을 변화의 원인으로 보는 것은 중요한 시사점을 하나 더 갖는다. 바로 인간 세계의 운영자는 신인가 인간인가 하는 점이다. 인간 세계를 신이 다스린다면 변화는 외부의 개입으로 인한 것이다. 하지만 내부 모순으로 인해 변한다면 신의 개입은 없다. 적어도 창조 이후에는 개입하지 않는 것이다.
즉, 내부 모순으로 변화를 설명하는 변증법은 신으로부터 인간이 독립한다는 함의도 있는 것이다.
변증법은 인간사회가 내부 모순으로 인해서 변해 왔다고 설명한다.
헤겔은 인정 욕구로 그걸 설명한 것이다. 마르크스는 경제의 모순으로 설명한다. 즉, 관념론이 아니라 유물론이다.
마르크스의 자본주의 설명으로 들어가 보자.
노동자는 자유롭다. 하지만 자유롭지 않다. 이는 모순이다.
자유롭다는 것은 정치적인 의미에서다. 하지만 경제적으로는 전혀 자유롭지 않다. 사장의 말에 복종해야 한다. 아래는 사장의 성희롱 사례가 노조덕에 폭로된 예외적 사례다.
노조는 피해 여학생과 현장에 있던 여직원 등을 통해 사실을 확인한 뒤 인터넷 게시판을 통해 최 대표의 성희롱 발언에 대한 진상규명과 처벌을 요청했다. 노조 게시판이 시끄러워지자 모기업인 ㅅ그룹은 지난 3월 윤리사무국 직원을 보내 조사를 벌였다. 그러나 감사 결과 ‘혐의 없음’ 결론이 나오자 여직원들은 추가 성희롱 피해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
노조에 접수된 성희롱 사례에 따르면 최 대표는 지난해 호텔 헬스클럽에서 운동을 하던 중 여직원에게 “이런 운동을 하면 젖통이 커지냐”고 말했다. 같은 해 열린 주방 직원들과의 족구대회에서는 한 여직원이 옆자리에 앉자 최 대표가 “어! 이×, 사복 입으니까 섹시하게 생겼네”라고 말했다. 한 여직원은 “최 대표가 다가와 목 주위를 킁킁대며 냄새를 맡아 수치심을 느꼈다”고 말했다. 회식 자리에서 최 대표가 성적 모욕감을 유발하는 건배사를 했다는 증언도 나왔다.
“[현장에서]“성희롱 사장을 고발합니다””, <경향신문>, 2010-07-23 02:41:49
노조가 ‘추가 성희롱 피해 사례를 모으기 시작했다’는 부분이 있다. 노조가 조사를 하기 전에는 사람들이 그냥 참았다는 말이다. 경제적으로 자유롭지 못하니까 사장한테 함부로 대들 수가 없었던 것이다.

정치적 자유와 경제적 부자유 사이의 모순이다. 자본주의적 민주주의의 주요 모순중 하나다.
자본주의의 모순을 또 하나 보자.
전기는 공공재다. 그런데 김대중 정부는 발전을 민영화하려고 했다. 노동자들의 투쟁으로 저지됐다.
그럼 공공재가 공공성 있게 사용되고 있으니 일단은 모순이 아니라고 할 수 있을 것이다.
그러나 전기만 공공재일까? 아니다. 전력뿐 아니라 통신, 가스 등은 모두 공공재적 성격을 띤다. 그런데 기업의 손에 맡겨져 있다.
마르크스는 여기서 기업 일반으로 한발 더 나아간다.
기업은 사람들을 고용한다. 이윤을 내려는 것이다. 다시 말해, 자본가의 사적 재산을 불리기 위해서 노동력을 고용한다.
그런데 영화 <전우치>에서 전우치는 500년만에 풀려나 신선들에게 묻는다.
“왕이 없다면 백성들은 누가 먹여 살리는가?”
신선들은 대답합니다.
“상인들이 먹여 살립니다.”

전우치는 한탄한다.
“장사치들이란 자신의 이익을 위해서 속임수도 가리지 않는데, 그런 장사치들이 백성을 먹여 살린다는 말인가?”
여기서 우리는 중요한 통찰을 발견한다.
상인들은, 다시 말해 사장들은 자기 이윤을 위해 기업을 운영하는데 그것이 많은 사람들을 먹여 살린다. 그렇다면 기업은 공공재일까 사유재산일까.
이는 모순이다. 사유재산이 공공적 역할을 하고 있다.
물론 자본주의를 옹호하는 경제학자들은 ‘사적 소유를 향한 이기심이 자연히 공공성을 충족시키니 이 얼마나 아름다운가’ 하고 외친다.
그러나 정말 그런가. 삼성 이건희가 반도체 공장 노동자들이 백혈병에 걸려 죽어도 결코 산업재해라고 인정하지 않고 외면하는 것을 보면 별로 그런 것 같지도 않다.

사유재산이 수많은 사람들의 목숨을 책임지는 공공적 역할을 하는 체제라는 점이 자본주의의 중요한 모순이다. 이 때문에 수많은 갈등이 생겨난다. 이 모순이 해결되지 않는다면 인류는 불행할 것이다.
그래서 마르크스주의는 말한다. ‘자본주의가 완벽하다는 말은 헛소리다. 자본주의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고 생각할 지도 모른다. 하지만 자본주의에는 내부 모순이 있어, 그 모순 때문에 언젠가는 무너질 것이다.’
자본주의가 공공성을 어느정도 책임질 때는 모순이 두드러져 보이지 않는다. 2차대전 직후부터 70년대까지 이어졌던 대호황의 시기에 서구에서는 어느정도 완전 고용이 달성됐고 사회의 갈등은 어느 정도 봉합됐다.
하지만 지금 같은 경제 위기 시기에는 어떻게 될지 모른다. 이제 우리는 자본주의하 기업의 소유권과 공공적 역할이라는 모순이 서로 충돌하는 경우를 발견하게 된다. 2009년 경제 위기가 세상을 강타하면서 바로 그렇게 됐다.
- 기업은 사적 소유다, 해고하고 임금을 깎아도 된다.
- 우리 일자리를 마음대로 해선 안 된다, 해고는 살인이다!

“해고는 살인”이라는 구호를 쌍용차 때 마주했다. 기업과 노동계급이 직면하는 핵심적 모순인데 이런 모순은 경제 위기 때만 되면 첨예해 진다.
물론 경제 위기가 없으면 이 모순은 비교적 잠잠해진다. 그래서 마르크스는 《자본론》에 그렇게 공을 들였다.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왜 경제 위기가 필연인지를 밝혔다. 그래서 이런 모순의 충돌이 심해질 수밖에 없다고 하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 공황론에 대해서는 왜 세계는 지금 경제 위기에 직면했는가?를 참고)
그래도 많은 사람들은 이렇게 물을 것이다. “하지만 세상이 변할 것처럼 보이지 않는데.”
다음은 바로 이에 대한 변증법의 대답이다.
양질 전화
변증법의 또다른 중요한 측면은 바로 양질 전화다. 양이 쌓이다보면 질이 변한다는 것이다.
예컨대 사람의 성장을 보자. 아기 때의 사촌 동생이 어느날 어엿한 대학생이 돼서 내 앞에 나타난다. 나에겐 갑작스런 일이지만 사촌동생을 키우던 작은 엄마는 하루하루 아기의 변화를 지켜봤다. 아기는 하루하루는 변했지만 그것이 매일매일 아기를 다른 존재로 만들지는 않았다. 하지만 그것이 쌓여 10년, 20년이 지나니까 아기는 더이상 아기가 아니게 됐다. 어른이 된 것이다.
다시 말해 양이 쌓여서 질적인 변화를 만들어낸 것이다.
자연과학에서 이런 사례는 많이 찾아볼 수 있다. 예컨대 물을 끓이면 99도까지는 물이지만 100도가 되면 수증기로 질적 도약을 이룬다.
변증법은 양이 점차 쌓이면 어느 순간 질적 변화로 도약하는 것이 세상이라고 말한다.
이명박에 맞선 2008년 촛불 시위도 살펴 보자. 아래는 촛불의 배경에 관한 내용이다.
<경향신문>이 메릴랜드대학교ㆍ동아시아연구원과 공동으로 국제 여론 조사를 해 발표한 결과를 보면, 한국인의 78퍼센트가 “정부는 소수의 거대 이익집단의 이익만을 대변한다”고 답했다(5월 15일치). 이명박 정부의 ‘강부자’ 내각 등장으로 “대기업 외국인 강남부자를 위한 정부”라는 생각은 더욱 굳어졌을 것이다. 오늘날 정치인들과 평범한 사람들의 거리는 더욱 멀어지고 있다.(“버스값이 70원 하냐”는 정몽준에 대해 시위대는 “정몽준은 버스 타라”고 외쳤다.)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는 소위 ‘민주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지난 10~20년 동안에 꾸준히 발전해 왔던 일이다. 양극화 문제에서 보듯이 사회적 불평등이 더 심화됐고, 선출되지 않은 기업 집단의 결정권이 더 커졌고, 대중이 동의하지 않는 신자유주의 정책을 강요하기 위해 기본적인 민주적 권리가 후퇴하는 일도 있었다. 노무현 정부가 한미FTA 반대 집회를 원천 봉쇄했듯이 말이다. 사실, 이것은 한국만의 예외적 현상이 아니다. <워싱턴포스트>가 인터뷰한 미국 시위대의 외침에서 보듯이, 지난 10~20년 동안 전 세계에서 같은 일들이 벌어졌다. “정부는 판매용이고 대기업이 정부를 구입한다.”
김하영, “촛불은 어디로? ─ 중간 평가와 전망”, <저항의 촛불> 2호, 2008-08-14
“따지고 보면, 이런 문제는 소위 ‘민주화’ 과정이라고 부르는 지난 10~20년 동안에 꾸준히 발전해 왔던 일이다” 하는 평가는 촛불이라는 질적 도약이 있기까지 수많은 변화가 천천히 쌓여 왔다는 점을 짚는다.

촛불의 시발점이 된 광우병 쇠고기 문제 역시 한미FTA 반대 투쟁 당시 민주노동당 등이 꾸준히 제기해 온 문제다. 그런 꾸준한 제기가 쌓여서 촛불에 불을 댕긴 것이다.
당장은 변화가 없어 보일지 모른다. 그러나 꾸준히 변화를 관찰해 보면 다르다. 촛불이 느닷없이 눈앞에 나타난 것 같지만, 꾸준한 관찰을 한 사람들에게는 물이 10도에서 100도까지 올라가는 과정이 눈에 보였을 것이다. 변증법은 바로 그런 운동의 원리를 설명해 주는 철학이다.
맺으며
이 글에서 나는 마르크스주의 입장에서 중요하다고 생각하는 변증법의 세 가지 요소를 다뤘다.
변화, 모순, 양질 전화.
이 세 가지를 염두에 두고 사회를 관찰한다면 우리는 비관론에 빠지지 않고 이명박 정부에 맞서 싸울 수 있을 거라 생각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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