개성공단 봉쇄(?)와 제국주의

한미의 군사훈련은 여전히 남북관계가 동북아관계에 종속돼 있음을 보여 주는 것 아닐까? 출처: 통일뉴스

남북관계에 따듯한 봄이 왔고, 남북관계는 역사의 큰 물줄기에 의해 안정적인 관계에 들어섰다는 전망이 많았다. 다소간의 껄끄러운 상황은 있겠지만 큰 물줄기는 변하지 않을 것이라는 관측이 있었다. 아마 이런 관측을 했던 사람들은 여전히 이 관측을 폐기처분하려 하지는 않을 것 같다.

나는 생각이 다르다. 역사는 종교가 아니다. ‘믿음’이야 나쁜 것이 아니고 특히 남북 화해에 관해 사람들이 갖는 열망을 대변하는 이런 생각이 나쁜 것은 아니지만 현실 정치의 영역에서 믿음이 분석을 대체하면 좋지 않은 일이 벌어지곤 한다.

남북관계가 아니라 동북아 관계

남한이 북한을 몰아붙이고, 북한은 개성공단을 볼모로 한미를 협박하는 그림이 그려지고 있다. 이것은 한반도의 근본적 정세가 변하지 않았기 때문이고, 남북관계가 남북관계보다는 동북아 정세, 그리고 세계 정세에 종속돼있다는 것을 보여준다.

미국이 중국을 ‘잠재적 적국’으로 설정하고, 북한을 그 견제의 빌미로 삼는다는 것은 알만한 사람들은 다 알 수 있는 이야기다. 그런데도 주류 언론에서 이런 분석을 찾아보기란 하늘의 별따기다. 나는 왜 이런 일이 벌어지는지 알 능력이 아직 없다.

그럼에도 분명한 것은 여전히 현실세계는 1,2차 세계대전을 낳았던 그 야만적 국제관계의 틀에서 한 치도 벗어나지 않았다는 점이다.

경제의 집약된 표현인 정치, 그리고 국가

개성공단을 끊어질 수 없는 남북 교류의 상징으로 여긴 사람들을 탓할 일은 아니나, 그런 현실 인식은 안이했다고 본다. 개성공단은 남한 일부 자본가의 북한 진출 희망과, 북한의 ‘나쁠 거 없지’ 하는 태도가 결합돼 탄생했다고 나는 생각한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개성공단이 평화의 상징으로 작용하는 것이 아니라, 개성공단 역시 남북 정치정세의 – 더 나아가 동북아 정세의 종속변수일 뿐이라는 점을 이해하는 것이다.

경제주의

100년 전, 레닌은 러시아 좌파 내부의 ‘경제주의자’들과 치열하게 맞섰다. 그들은 정치를 경시하고 모든 문제를 경제적 관점으로만 축소해 해석하려 했다. (레닌이 이처럼 경제주의와 싸웠다는 사실만 보더라도, 마르크스주의가 경제에만 치우쳤다는 주장은 터무니없다.)

‘경제주의’는 좌파 진영에만 국한된 현상은 아닌 듯하다. 물론 오늘날 남한의 정치 지형에서 남북관계를 중시하는 이들이 대체로 좌파로 분류되니, 이들 역시 좌파라 부를 수 있을지도 모르겠다. 그러나 노무현 전 대통령 역시 개성공단의 의의를 과장한 측면이 있다는 점에서, 남북관계와 관련한 ‘경제주의’가 단지 좌파만의 문제라고 보기는 어렵다. (노무현은 분명 우파에 속한다.)

경제가 정치를 압도한다는 생각은 정치를 지나치게 협소하게 이해하는 것이다. 정치는 곧 경제의 집약적 표현이며, 이를 수행하는 국가는 일시적인 경제적 손실을 감수하더라도 더 큰 성과를 위해 과감한 모험에 나설 태세를 갖추고 있다. (혹은 불가피하게 그런 소용돌이 속으로 빨려들어가게 된다.)

제국주의

오늘날의 남북관계는 이를 잘 보여 준다. 경제(군사)대국으로 성장하는 중국을 견제하는 미국, 미국의 고립/압살에 맞서 생존해야 하는 북한의 부패한 관료들, 그리고 친미적 유전자를 폐기하고는 살아남을 수 없다고 느끼는 남한의 수구세력들은 각기의 이해관계를 갖고 정치를 해 나간다. 그리고 이들에게 작은 ‘경제’인 개성공단은 종속변수일 뿐이다.(심지어 이명박 정권이 개성공단 입주 자본가들에게 인색한 지원 약속조차 아직 하고 있지 않은 것을 보면 더더욱 그런 생각이 든다.)

이것은 고전적 제국주의 이론의 합리적 핵심이 오늘날에도 유효하다는 것을 보여 준다.

남북관계 해법은

해법을 쓰려는 글은 아니지만, 짤막하게라도 언급해야 할 듯하다.

동북아 정세가 규정하는 남북관계의 최종 결판은 중미관계에 달려있고, 이 관계라는 것은 아슬아슬 위태할 뿐이다. 중국과 미국의 경제적 의존관계가 심했던 것은 군사적 폭발력을 더 키웠을 뿐이고, 지금 다시 보호무역주의가 대두하는 상황에서 과거의 관계는 비관적인 전망을 더할 뿐이다. 중국과 미국은 단기적으로는 소소하게, 장기적으로는 아마도 크게 갈등을 일으킬 가능성이 크다.

이런 극단적이고 근본적인 힘에 저항할 수 있는 것은 이 논리를 근본적으로 거스르는 힘을 사용하는 수밖에 없다. 이 국제질서를 이용해보려고 하다가는 구한말 러시아와 청, 일본 사이를 왔다갔다하며 제국주의의 희생양이 됐던 실수를 반복할 뿐이다.

오히려 우리에게 희망은 오늘날 그 어떤 시대보다도 강력해진 피억압계급의 직접행동에 호소하는 일이다. 맑스주의는 피억압계급의 힘을 어떻게 인류의 미래를 위해서 사용할 수 있는지에 대한 방법론이다. 피억압계급의 일부로서 우리는 세계를 지배하는 논리에 저항할 가능성을 탐구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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