AI가 대량 실업을 불러올 것이라는 경고가 많습니다. 빌 게이츠, 오바마, 일론 머스크 등 유명인들이 앞장서서 공포와 환상을 부추깁니다.
그러나 자본주의에서 기술이 노동에 미치는 영향은 기술이 이윤 추구에 어떤 방식으로 사용되는가에 따라 달라졌습니다.
19세기 영국에서 방적기 도입은 기존의 수공업보다 훨씬 더 고된 노동과 실업을 낳았습니다.
인터넷의 발전은 노동시간을 늘리고 노동강도를 강화시켰습니다. 실업을 늘린 것 같지는 않습니다.
AI는 어떨까요.
기계제 대공업이 노동에 가져온 변화에 대한 마르크스의 분석을 보면서 AI 시대를 살펴 봅시다.
기계화의 결과
마르크스는 《자본론》에서 영국의 섬유 산업이 기계화되면서 어떤 일이 벌어졌는지 분석합니다.
첫째, 임금이 하락했습니다. 기계화는 기존에는 숙련직 남성 노동자만 가능했던 일을 누구나 할 수 있게 만들었습니다. 여성과 아동이 노동시장으로 쏟아져 들어왔습니다. 자본가들은 이들을 저임금으로 부리면서 임금 수준을 낮췄습니다.
둘째, 노동 시간이 급격히 늘어났습니다. 밤이 되면 잠을 자야 했던 인간이나 가축과 달리 기계는 24시간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자본가들은 기계를 풀가동해서 기계의 가치가 떨어지기 전에 최대한 이윤을 뽑아내려고 했습니다. 인간은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해야 했습니다.
19세기 초 영국에서는 12시간 노동이 보편적이었는데, 농업이나 수공업 시대엔 없던 일이었습니다. 14세기 흑사병 직후 임금이 높았던 시기에 농업 노동자들은 1년중 4개월만 일했습니다. 농사를 지으며 광부 일도 병행했던 사람들도 1년중 6개월만 일했습니다(《과로사회 미국: 예상치 못한 여가의 몰락(The Overworked American: The Unexpected Decline Of Leisure)》, 줄리엣 쇼어, 1993-03-24).
셋째, 노동강도가 강화됐습니다. 장시간 노동으로 생명이 위협받자 노동자들은 저항했습니다. 국가는 노동시간을 제한했는데요. 그러자 자본가들은 노동강도를 높임으로써 생산성을 향상시켰습니다.
부품이 된 노동자
마르크스는 이런 변화를 종합하며 이제 노동자가 대공장 기계의 부품 신세로 전락했다고 말합니다. 기계제 대공업 이전에는 노동자가 노동을 통제했지만, 이제 노동자는 기계를 소유한 자본가의 통제를 받으며 기계의 리듬에 맞춰 일하는 부품이 됐습니다.
생산 도구의 거대한 변화가 이런 결과를 낳았습니다. 매뉴팩처 시절에 노동자 자신이 통제하는 작은 도구를 사용해 일했습니다. 노동자는 피곤하면 노동을 중단할 수 있었습니다.
대공장의 거대한 기계는 더이상 노동자 한 명의 의사에 따라 멈추지 못합니다. 자본가는 기계를 풀가동해 이윤을 극대화하려 했고, 노동자들은 기계에 맞춰 생명이 소모됐습니다.
실업
기계의 혁신은 노동을 절약했습니다. 생산성이 올라가도 고용된 노동자 수는 별로 늘지 않았고 오히려 줄어드는 경향이 있었습니다.
게다가 기계는 수공업자들을 학살했습니다.
수십 년 계속되어 오다가 드디어 1838년에야 끝난 영국 수직조공들의 점차적인 몰락보다 더 처참한 광경은 세계 역사상에 없다. 그들 중 많은 사람이 굶어죽었으며, 또 많은 사람이 가족들과 함께 오랫동안 하루 2.5펜스로 연명했다.
(《자본론 1 (하)》, 2015년 개역판, 2015-03-10, 비봉출판사, 582-583pp)
(1830년대 영국 랭카셔 지방 20~40대 노동자 평균 주급은 21실링(252펜스)였습니다(〈서울경제〉, 음울한 자본주의…1833년 공장법, 2017-08-29)).
영국뿐 아니라 인도의 수공업자들도 굶어 죽었습니다. 인도 총독은 1834~1835년에 “면방직공들의 해골이 인도의 벌판을 하얗게 물들이고 있다”고 보고했습니다(같은 책 583p).
기계제 대공업하에서는 오직 생산이 급격히 확장될 때만 고용이 늘었습니다. 그런데 1815년부터 1863년까지 48년 중 28년이 불황과 침체의 시기였고 회복과 번영은 20년에 지나지 않았다고 마르크스는 지적합니다(같은 책 618p).
이제 AI가 가져오는 노동의 변화는 어떤지 살펴 봅시다.
AI 시대의 노동
알고리듬의 통제
마르크스 시대에 기계가 공장 노동자들의 노동 과정을 지배했듯, 오늘날 AI는 공장과 공장 바깥 노동자들의 노동 과정까지 지배하고 있습니다.
인터넷 기술의 발전은 자본가들의 통제 범위를 물리적 공간 너머로 확장시켰고, AI는 그 위에서 최적의 착취 효율을 계산해 냅니다.
배달, 택시, 대리운전 등 노동자들은 AI 알고리듬의 지시에 따라 움직입니다.
탈숙련화
기계가 탈숙련화를 통해 노동 비용을 절약했던 것처럼 AI도 일부 분야에서 탈숙련화를 부르고 있습니다.
개발 언어간 경계가 흐릿해지고 있는데, 한 언어를 다른 언어로 변환하는 것을 AI는 손쉽게 해내기 때문입니다.
또한 예전이라면 초급 개발자가 했을 법한 단순반복 작업을 AI는 손쉽게 해냅니다.
번역가들은 AI 번역을 수정하는 역할로 내몰리면서 번역 단가가 하락했습니다.
게임업계에서는 AI가 해고를 불렀습니다. NPC(비플레이어 캐릭터) 일러스트나 대사 작가가 AI로 대체되고 있습니다.
호황기라면 노동 절약적 혁신에도 산업 자체가 확장하며 고용이 늘어날 수 있지만 지금은 오랜 대침체의 시기라 그럴 것 같진 않습니다.
과장은 경계해야
그러나 AI가 노동을 엄청나게 대체할 것이라는 전망은 과장입니다. 아직까지 AI가 모든 산업에 대해서 노동절약적 기술 발전인지는 좀 의문스럽기 때문입니다.
AI로 인한 생산성 향상은 계속 논란거리입니다. 예컨대 개발에서 AI 도입은 상당한 생산성 향상을 보였다는 보고도 있지만, 별 도움이 되지 않았다는 보고도 있습니다.
사무직 11개 직종을 대상으로 한 대규모 연구는 “AI 챗봇의 확산과 채택이 실제 노동자들의 수입이나 노동 시간에 유의미한 변화를 가져오지 않았다”고 보고했습니다.
해고 원인이 정말 AI 도입 때문인지 잘 살펴 봐야 합니다. 과장도 있고, 자본가들도 해고의 핑계로 AI를 사용하는 경우가 있기 때문입니다.
어떤 사람은 “미국 실리콘밸리에서 가장 똑똑한 사람들이, 가장 먼저 자리를 잃고 있다. 아이러니하게도, 그들의 일자리를 앗아간 건 바로 그들이 만들고 있었던 인공지능 때문이다” 하고 말했습니다.
그러나 이런 주장은 너무 심한 단순화입니다. 최근 세계적 IT 해고는 2022년 이래 고금리로 인한 투자 감소와 천문학적 AI 투자에도 불구하고 아직 수익이 나지 않는 상황 때문입니다.
시기도 맞지 않습니다. IT 노동자들의 대량 해고는 2022년 말부터 시작됐는데, ChatGPT가 부상한 것 역시 2022년 11월입니다. ChatGPT 3.5가 출시되자마자 수만 명이 해고됐다는 건 말이 안 되죠.
앞으로 어떻게 될지는 모르겠지만, 현 국면에서 AI가 해고를 낳는다고 하면 일단 의심의 눈으로 살펴 봐야 합니다.
투쟁의 중요성
앞으로는 AI가 일자리를 대체하며 임금 하락과 실업을 낳을 가능성도 있습니다.
그러나 마르크스는 임금 하락이 필연적이고 저항할 수 없는 것이라고 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투쟁은 마르크스주의에서 핵심 요소입니다.
19세기의 참혹한 노동 조건은 19세기 말부터 20세기 초까지 연이어 이어진 혁명과 반란을 통해 급격히 개선됐습니다.
2차대전 직후 유럽의 전투적 노동운동은 임금을 극적으로 상승시키면서 복지 시대를 열었습니다.
한국에서도 87년 이후 강력한 운동이 97년 IMF 전까지 급격한 임금 인상을 견인했습니다.
불황과 AI 시대라고 해서 투쟁으로 조건을 개선하지 못할 이유는 전혀 없습니다.
여전히 자본이 노동에 의존한다는 사실이 매우 중요합니다.
예컨대 한 개발자는 “LLM으로 몇 달간 코딩을 한 후, 이제 다시 두뇌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원문)” 하고 말했는데 AI는 단순한 코드는 잘 작성했지만, 전체 코드베이스의 일관성을 고려한 코딩은 미흡했습니다.
AI가 조수로서 코드 작성 효율성을 높여 주지만 결국 AI가 작성한 코드는 반드시 개발자가 살펴 봐야 합니다.
자본이 노동에 의존할 수밖에 없는 이런 문제는 결코 쉽게 해결되지 않을 것입니다.
자본주의라는 맥락
기계제 대공업은 거대한 생산성 향상이라는 진보였지만, 자본주의라는 맥락 속에서는 노동자를 효율적으로 착취하는 데 사용됐습니다.
AI도 마찬가지입니다. 인류는 지적 노동에서도 인간을 상당히 보조하고 어떤 측면에서는 대체할 만한 도구를 만든 것입니다.
그러나 이 도구가 자본주의라는 맥락에서 사용되는 한 결코 삶의 질 향상을 가져오지 못할 것입니다.
노동이 이윤의 수단이 아니라 그 자체로 목적이 돼는 사회가 돼야 AI는 비로소 전 인류에 봉사하게 될 것입니다. 이를 위해서는 체제를 근본적으로 바꾸는 노동자들의 집단적 투쟁이 필요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