환단고기 폄훼와 학문의 자유보장 - 우인식 변호사 2024.11.24 아 예 예 안녕하십니까? 저는 우인식이라고 합니다. 그 김주인 역사주권 재단 이사장님의 이제 인연이 돼서 오늘 이렇게 뭐 발표를 하고 하게 됐는데 사실은 앞에서 여러 분들의 이제 강의를 들어보니까 제가 사실은 발표할 그런 역량이나 그런 게 매우 부족함에도 불구하고 어 이렇게 발표 기회를 주셔 가지고 미력하나마 제가 아는 부분에 대해서 조금 여러분들께 공유를 드리려고 합니다. 사실은 제가 그 역사를 전공한 정통 학도라고 이제 소개를 시켜 주셨는데 조금 과장이 있고요. 저는 이제 학부에서 이제 국사학을 전공을 하긴 했는데 그 이후로는 개인적으로 공부를 했지 이제 그 대학원이라든지 뭐 이런 과정을 밟지는 못해서 정통 역사학도라는 거는 약간 과장이 있다는 점을 좀 말씀을 드리겠습니다. 어 제가 발표할 주제는 환단고기 폄훼와 법적인 관점에서 본 학문의 자유 보장이라는 주제가 되겠습니다. 먼저 이제 그 제가 들어가면서 생각을 해 본 거는 우리가 그 개천절을 매년 10월 3일 날 이렇게 국경일로 이렇게 기념을 하고 있는데 일반 사람들이 이 개천절의 의미에 대해서 과연 얼마나 알고 있을까 하는 생각이 들었거든요. 그래서 저도 이번 기회에 다시 공부를 했는데 근데 문제는 개천절을 우리가 기념을 하고 있지만은 과연 그 이후에 이제 당군 왕검께서 이제 개천절 아니 그 나라를 세우시고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우리 국사 교과서에서 과연 얼마나 다루고 있을까 여기에 대한 의문이 굉장히 많이 들었습니다. 일종의 이거는 자기 부정이 아니고 모순이 아닐까, 왜냐하면 우리가 국경일 정도로 이렇게 굉장히 기념을 하고 있지만은 그 이후의 역사에 대해서는 교과서에 안 나온다 이거는 굉장히 이상한 것 아닐까요? 그래서 저는 그 부끄럽지만 그 의문을 한 30... 중학교 시절까지 굉장히 이상하다 이상하다 품었는데 그때 이제 우연히 발견한 것이 이제 환단고기라는 책이었습니다. 그래서 여기에 거기에 대한 설명이 있구나 그래서 이제 그때부터 개인적으로 이제 그 관계된 책들을 읽고 어 이 문제의식을 갖게 됐죠. 근데 왜 그러면은 교과서에 나와야 될 내용들이 계속 안 나오는지 지금도 사실은 거의 안 나오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제가 개인적으로 발견한 그 30년 이후로도 아직까지 나오고 있지 않다 이거는 큰 문제가 있는 거다 그래서 그런 문제 의식 그리고 그러면은 도대체 어떤 문제가 있기 때문에 그러면 우리 교과서에서 일반 학생들이 그거를 배우지 못할까 하는 생각을 하게 됐고 아까 뭐 설명 아니 처음에 이제 소개해 주셨듯이 제가 이제 서울대 국사학과라는 데를 다녔습니다. 다녔는데 다니면서 이제 물론 생각이 약간 바뀐 것도 있지만은 아 뭐 이런 이런 이런 이유 때문에 교과서에서 이게 실리기가 상당히 어렵구나 하는 것을 개인적인 어떤 체험으로 좀 깨달은 바가 있었습니다. 그러니까 제가 환단고기 에 관심을 갖고 서울대 국사학과까지 들어갔는데 솔직하게 말씀드리면 그 4년 동안 여기에 대해서 한 번도 무슨 선후배 교수님들 지도 교수가 이야기를 해본 적이 없어요. 왜냐하면 이야기를 꺼내는 순간 당장 그거는 위서 아니냐 그리고 학문 토론의 대상 자체가 아니다 그러니까 이야기를 할 수도 없었고 그리고 이야기를 못하니까 뭐 거기에 대한 무슨 뭐 석사 교육이라든지 뭐 박사 교육이라든지 이런 게 진행되는 것 자체가 원천적으로 차단되는 거죠. 그래서 제가 개인적인 경험이지만은 그런 걸 느꼈기 때문에 그리고 저도 사실은 처음에 들어갔을 때는 고대사 부분을 전공할 생각이 있었고 이 부분은 잘못된 부분을 제가 고대사를 전공하면서 바로잡아야 되겠다는 생각을 했는데 그거를 저도 그 당시에 너무 빨리 이제 꺾게 된 거죠. 그러니까 저같이 환단고기에 관심 있는 사람도 그런 어떤 무거운 분위기 속에서 더 이상의 이제 발전이 없었다 그리고 그러면은 환단고기 자체에 대해서 관심이 없었던 채 이제 비슷하게 학교 다녔던 선후배들은 아마 더 여기에 대해서 뭐 관심이 없거나 아니면 더 그런 걸 많이 받았을 것이다 이런 거를 제가 많이 느꼈고 그래서 어 이 부분을 전공을 하려면 굉장히 개인적인 용기도 필요하지만은 용기 이전에 그 학교 내에서 그런 자유로운 어떤 학문적 어떤 다양성에 대한 토론 자체가 없었다 없었고 지금도 뭐 제 추측이긴 하지만은 마찬가지일 것이다. 그래서 여기에 대한 이제 제가 문제의식을 갖게 됐습니다. 그래서 이제 그 구체적으로 그 연장선상에서 설명을 드리면 그럼 왜 그럴까 그러면 우리나라 국사학계 형성상 특수성을 한번 살펴봐야 된다. 잘 아시겠지만은 일본이 일체 침략을 하기 이전에 제일 신경 쓴 게 한국 당시 이제 조선의 역사를 정리하는 부분이었거든요. 정리를 어떻게 하느냐 자기들 침략에 유리한 부분을 위주로 정리를 한 거죠. 그래서 그게 대표적인 게 1925년에 조선사 편수회를 설치를 하고 13년 동안 연구를 한 다음에 이제 1938년에 조선사 37책을 편찬을 합니다. 그리고 이제 그것을 뒷받침하기 위해서 1924년 경성제국대학에 이제 사학과를 설치를 하죠. 그리고 이 사학과는 법인격은 다르지만은 그 면면이 훗날이 이제 서울대 사학과 국사학과로 흡수가 되는 거죠. 그래서 이 과정에서 실무적으로 중요한 역할을 한 사람들이 해방 이후 우리나라의 국사학과를 주도하게 됩니다. 대표적인 사람이 이제 그 이병도 신석호 이런 분이죠. 이런 분 공통점이 뭐냐 당시 조선사 편수회 수사 간부를 했다. 그리고 해방 후에 서울대 고려대 성균관대 같은 우리나라 주요 대학에서 제자들을 많이 키워가지고 결과적으로 우리나라 사학계 및 고대사학계에 큰 영향을 줬던 그리고 이분들은 당시에 이제 와세다대나 그리고 이제 경성제국대학 사학과에 다니면서 당시 주류학 일본의 관찬 사학자들과 스승과 제자로 연결돼서 그 학문적 영향을 받을 수밖에 없는 위치에 있었다는 겁니다. 그리고 또 하나는 사람들이 간과하는 것 중에 하나가 그 일제 식민사학의 부정적인 영향만을 말하는데 사실은 저는 오히려 이 부분도 굉장히 중요한 것 같습니다. 조선 임진왜란 이후에 조선 후기에 이제 당시 조선의 사상사적 흐름을 보면은 조선왕조는 이제 명나라가 당시 이제 일본군을 물리쳐 줬다는 이런 의식 그리고 그 은혜를 갚아야 되겠다는 그런 의식이 굉장히 강해서 어 당시에 그 자기를 스스로 소중화로 자처하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 조선 후기의 모든 기본이었고 그리고 조선이 멸망할 때까지 그것이 쭉 유지될 수밖에 없었다는 거죠. 그래서 보통 우리 교과서에서 이제 실학자들을 말하면서 상당 부분 자주 의식을 회복했다고 이렇게 말하지만은 그것도 사실은 굉장히 어폐가 있는 말이 거기서 그 실학자들조차도 기자조선을 굉장히 강조한다든지 그리고 한사군 문제에 있어서도 사실은 어 재야 사학에서 비판하는 그 한사군의 그 위치와 별반 다른 게 없습니다. 그 말은 그 말인즉슨 일제 식민사관의 부정적인 영향도 있지만은 이미 조선 후기에 상당 부분 그런 뿌리가 있었습니다. 그리고 저도 정확하게 기억은 나지 않지만은 우리가 굉장히 그 대학자라고 이렇게 알고 있는 정약용조차도 한사군 위치 이런 거 비정하는 거 보면은 별반 그렇게 큰 차이가 없어요. 그게 그 말이 무슨 말이냐 하면은 이미 일제 식민사관 이전에 고려 후기에 아주 그런 자주성이 상실된 역사 의식이 이미 주류로 자리 잡았고 그리고 그렇게 따지고 이렇게 쭉 올라가다 보면은 고려 때 성리학이 본격적으로 들어온 이후부터는 성리학적 유교 사관의 영향을 사실 받을 수밖에 없었다. 그래서 하여튼 결론은 지금 여러분 잘 아시겠지만은 어 우리나라의 독립이 어떻게 보면은 어 도둑처럼 갑자기 온 측면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우리의 뭐 그렇게 생각은 하고 싶지만 현실은 우리의 100프로 힘으로 우리가 독립이 된 게 아니고 갑자기 온 그 독립과 건국의 과정 속에서 이런 주체적인 역사관을 우리 스스로 형상화할 수 있는 기회나 계기가 굉장히 제한적이었고 제한적이었기 때문에 다르게 보면은 예전에 어 성리학적 유교 사관이나 식민사관이 계속 영향을 압도적으로 줄 수밖에 없는 그런 환경에 있었다 이걸 좀 인식을 해야 될 것 같습니다. 다음으로는 이제 그런 측면에서 보면은 지금 주류 사학계라고 하는 이분들의 오늘 그 문제점에 대해서는 앞부분 발표에서 충분히 이제 나온 것 같고요. 어 제가 이제 어 제 글을 정리하면서 이제 조금 문제 삼을 부분은 환단고기와 요하 문명에 관한 부분입니다. 이 부분은 제가 왜 이제 그 부분을 거론을 했냐면은 제가 예전에 학교 다닐 때 그 그게 아마 1996년 경이라고 생각이 되는데 당시 제가 동양사학과 수업을 들었어요. 같은 연관된 사학과이기 때문에 들었는데 그때 당시 중국 고대사라는 수업을 들었었는데 그때 그 동양사학과 교수님이 중국의 이제 요하 문명을 말하면서 정말 난감해 난감해하면서 이분이 설명을 하셨거든요. 왜냐하면 황하 문명 양쯔강 문명보다 최소한 천년 2천 년 이상 앞선 문명인데 이게 그동안 우리 일반적인 상식으로는 요하 문명이라는 것은 중국의 동북 변방에 있기 때문에 이게 중심지로 한 번도 된 적도 없고 근데 여기서 갑자기 이렇게 선진 문명이 나왔는데 뭐 이걸 어떻게 설명해야 되냐 근데 저는 마음속으로 그때 당시에도 아니 환단고기하고 연결하면 바로 되는 거 아니냐 이렇게 생각을 했는데 제가 그 자리에서 용기가 부족해서 문제를 바로 제기하지는 못했습니다. 못했는데 어쨌든 그때 그게 96년이면은 벌써 지금 거의 뭐 30년 가까이 전에 이제 있었던 일인데도 우연이긴 하지만 그때 분명히 요하 문명이 중국 고대사에서도 다뤄야 될 정도로 굉장히 굉장한 선진 문명이었고 충분히 우리가 관심을 가질 어떤 가치가 있는 그런 발굴이었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류 사학계 입장에서는 이 요하 문명이 굉장히 거추장스러운 존재죠. 왜냐하면 기존의 중국에 고대사의 고대 국가하고도 연결이 안 되죠. 예를 들어서 우리가 상식적으로 알고 있는 뭐 중국에서 제일 고대 국가로 올라가는 국가가 하은주인데 하은주의 중심지하고도 너무 떨어져 있는 데죠. 그리고 그런 비슷한 나라도 연결되는 국가가 없어요. 중국에서 제일 오래된 역사서도 뭐 사마천의 사기라고 하는데 사기의 요하 문명하고 연결될 수 있는 국가가 없어요. 그러면 유일하게 이 요하 문명과 연결될 수 있는 국가 문명은 환단고기에서 말하는, 제 생각이긴 하지만, 고조선밖에 없다고 생각이 됩니다. 그래서 이 부분에 대해서는 우리가 충분히 관심을 가져야 돼요. 그리고 실제 지금 이런 관점에서 접근을 하면은 한반도에서 발굴되는 여러 그 빗살 무늬토기라든지 아니면 뭐 옥기라든지 아니면 그 적석총이라든지 여러 비슷한 점이 사실 또 많이 발견되고 있거든요. 그래서 그 부분을 충분히 연관성을 두고 고조선과 어떻게 관계가 있는지 역사적 어떤 해석으로 충분히 가능함에도 불구하고 여기에 대해서 충분한 해석을 안 하는 것 자체가 문제다. 그리고 왜 문제냐 아까 제가 설명드린 기존의 성리학적 유교 사관 그리고 식민사관이 혼종이 된 상태에서는 이런 당연한 연관관계에 대해서도 더 이상 생각을 하기 싫은 거죠. 그래서 저는 그게 굉장히 문제라고 생각하고요. 두 번째는 어 환단고기가 주는 긍정적인 효과로 민족사의 지평을 확대를 할 수가 있다. 예를 들어서 제가 어릴 때 그 삼국유사나 삼국사기를 읽으면서 제일 그 의문점이 든 것 중에 하나가 말갈이 굉장히 많이 나와요. 말갈과 전투한 부분도 나오고 그래서 나는 아니 이게 이렇게 많이 나오는데 말갈은 도대체 뭐 국가도 아니고 민족도 아니고 근데 왜 이렇게 많이 나오지 이런 의문점을 굉장히 많이 가졌거든요. 그게 무슨 말이냐고 하면은 삼국사기도 사실은 고려 인종 때니까 아무리 올라가도 12세기에 편찬된 거죠. 이미 유교적인 어떤 그 영향을 많이 받은 상태에서 편찬됐기 때문에 말갈에 대해서 삼국사기를 편찬했던 김부식도 과연 저기 정통한 어떤 유교 사관에서 벗어난 있는 그대로를 볼 수 있었겠나 굉장히 저는 의문스럽거든요. 그렇게 따지면은 이 말갈족이 통설 연후는 뒤에 이제 여진족이 되고 그리고 만주족으로 이렇게 되는데 그런 우리 민족사의 일원으로 볼 수 있는 측면이 충분히 있다. 그리고 이것은 역으로 청나라 때 자기들이 편찬한 책을 보면은 알 수 있습니다. 청나라 때 건륭제가 만주원류고라는 책을 편찬을 하거든요. 그 당시에 중국과 만주의 최고 학자들을 동원해서 아주 국가적 사업으로 이제 편찬한 관찬 사서인데 거기 보면은 그 자기들의 계통으로서 그 발해 부여 삼한 백제 신라 발해를 다 자기들이 스스로 포함을 하고 있어요. 우리가 뭐 그 당시 건륭제 조선이 무슨 건륭제한테 넣어 달라고 한 것도 아닌데 자기들이 스스로 자기 조상이 부여 삼한 백제 신라의 발해가 다 있다 이렇게 스스로 인정을 하고 있는 부분이고, 그리고 이보다 더 오래된 금사 원나라 때 편찬된 금사 그리고 조선 초기에 편찬된 고려사 고려사 절요 같은 데도 청나라 이전에 금나라의 시조가 신라와 고려와 연결된다 이런 걸 중국이 기록하고 있거나 아니면 우리가 스스로 기록을 하고 있거든요. 그렇게 따지면은 얼마든지 말갈이나 뒤에 여진 만주와의 연관성에 대해서 우리가 생각할 수 있는데 그러면은 의문을 가질 수 있잖아요. 그러면 왜 조선시대에 살았던 사람들은 그런 연관성에 대해서 별 인식이 없었을까? 그거는 유교의 영향이죠. 그 당시는 인종학적 무슨 요즘 말로 하면 DNA 분석하는 것도 없었을 거고 오로지 우리는 중국과 친해야 되고 기자 예를 들어서 기자 조선부터 우리가 시작돼야 이게 이렇게 정통으로 딱딱 맞는데 거기에 말갈이나 만주족이 끼어들 틈이 전혀 없는 거죠. 근데 하지만 그런 관점을 제외하고 보면은 충분히 우리 역사의 친연성을 인정할 수 있는데 문제는 지금 우리 주류 사학계나 우리가 보는 관점에서는 거기에 이제 끼어들 틈이 없다는 겁니다. 하지만 한단고기 같은 경우는 그 이미 유교사의 정통적으로 보는 그런 역사관에서 떨어진 책이기 때문에 오히려 더 새롭게 그거를 인식을 할 수 있고 만주족이나 청나라 그리고 그 이전에 금나라 역사도 포함되는 부분이 있다. 근데 이런 부분 이런 말씀을 드리면 너무 황당한 소리 아니냐 하시지만 저는 그렇게 생각하지는 않습니다. 왜냐하면 중국 같은 경우도 보시면은 예전에 중국 한족 중심의 역사 해석을 보면은 지금 중국 동북방에 있던 거란 원나라 이런 나라들이 자기들 역사가 아니게 볼 수도 있거든요. 근데 요즘은 안 그렇잖아요. 중국 심지어는 동북 지방에 있는 고구려 발해도 다 자기 역사라고 하잖아요. 그러니까 중국 사람들도 자기 그 보는 관점에 따라서 예전에 자기들이 이민족이라고 오랑캐라고 배척했던 사람들을 이미 지금 다 자기 역사로 다 편입을 하고 있거든요. 그러니까 이거는 예전에 E. H. 카라는 사람이 역사라는 것은 과거와 현재와의 대화라고 했지만은 그런 측면에서 보면 고정된 해석이라는 것 자체가 잘못된 겁니다. 이거는 그러니까 얼마든지 지금 우리의 관점에서는 이런 민족사의 집행 확대 측면에서 만주족이나 여진족의 역사를 다시 볼 필요가 있고 그런 그 근거를 제공하는 게 환단고기라고 할 수 있다 이렇게 생각이 됩니다. 그리고 이거는 지금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거고요. 그러려면은 역사 연구에 있어서 다양성 확대가 굉장히 필요하다. 지금 주류 사학계가 통설로 생각하고 있는 그런 역사적 해석은 사실은 어떻게 보면은 현재 이제 언어학 인종학 문화인류학 경제학 등 다양한 주변 학문의 도움을 받지 않은 겁니다. 오히려 그래서 이런 주변 학문의 도움을 받아서 종합적 판단이 필요한 거고 그리고 그러려면은 이제 역사학 연구에 있어서 이제 개개인이 누리는 어 학문의 자유가 진정하게 보장이 돼야 됩니다. 그래서 저는 이제 그 이 부분이 일종의 대학의 자유 즉 학문 카르텔과 개인의 학문의 자유가 충돌하는 영역으로 보고 싶습니다. 왜냐하면은 지금 아까 처음에 서두에 설명을 드렸지만은 왜 그러면 주류 학교의 이런 전통이 여러 다양한 생각 오늘 여기 현장에 오신 여러 분들의 다양한 생각에도 불구하고 계속 왜 이 유지가 되느냐 그거는 일종의 대학의 자유가 충분히 보장되는 거기에 어떤 모순점이 있는 겁니다. 왜냐하면 대학의 자유라는 거는 뭐 아시는 분도 계시겠지만은 이것도 왜 중요하냐면은 예전에 산업혁명 이전에 서구에서 당시 르네상스 시대에서 각자 당시에 이제 그 교황 체제에서 굉장히 억압을 당하고 있었는데 그때 그런 체제의 계몽 사상을 많이 퍼뜨리고 연구를 하기 위해서는 당시에 유럽에 있는 대학의 학문의 자유가 학문의 자유를 보장하는 게 굉장히 중요하고 그리고 거기에 대해서는 당시 교황이나 왕권도 간섭을 해서는 안 된다 그런 측면에서 이제 학문의 자유라는 게 중요하고 거기고 학문의 자유 중에 가장 중요한 부분에 하나가 고등 학문을 연구할 수 있는 고등 기관인 대학의 자유가 중요하다 이렇게 된 거거든요. 근데 이게 우리나라에서는 안 좋게 작용하는 부정적으로 왜냐하면은 그런 식으로 이렇게 해서 대학의 자유 학문의 의지를 충분히 주장하다 보니까 원래 아까 제가 말씀드린 우리나라의 이 빠른 독립 과정에서 그때 당시 각 대학을 장악했던 이런 세력들이 그대로 계속 그런 학문의 자유라는 울타리 안에서 자기 제자들 자기 그 학설들을 계승할 수 있는 제자들을 이렇게 쉽게 키워낼 수 있고 또 다른 면으로는 거기에 대해서 간섭하는 것 자체가 어려워진 거죠. 그러니까 여기서 예를 들어서 2013년도 경에 국정교과서 파동이라는 게 있었습니다. 당시에 이제 박근혜 정부 때 그 현대사 부분에 뭐 서술 이런 게 문제가 된다 그래서 당시 교육부에서 이제 그 수정 명령을 내리고 그래서 이제 국정교과서로 가야 된다고 이렇게 됐는데 그게 굉장히 역설적인 면이 있어요. 왜냐하면 당시 검인정 교과서라고 나와 있던 교과서들의 학술이 너무 천편일률적인 거예요. 그래서 당시 이제 교육부에서는 이건 또 너무 오히려 천편일률적이니까 대한민국의 대한민국 정통에 부합하게 이제 좀 고쳐야 되겠다 했는데 그때 이제 뭐 난리가 났죠. 이거는 대학의 자유 학문의 자유를 침해하는 거고 그래서 그때 제가 알기로는 그분들이 그 검인정 교과서 저자들이 교육부의 시정 명령에 대해서 행정소송도 제기하고 결국은 행정소송에서 이기지 못했지만은 이거는 학문의 자유를 침해한다 그래가지고 국정 교과서 자체가 없었던 일로 돼버렸습니다. 없었던 일로 그만큼 그 학문의 자유를 주장하고 대학의 자유를 주장하는 이게 만만치 않다. 굉장히 어떻게 보면 센 권력이다 이걸 기본적으로 깔고 이해를 하셔야 돼요. 그래서 제가 이 부분은 지금 기존 주류 강단사학계 입장에서 보면은 자기들은 학문의 자유를 충분히 주장하고 있지만은 여기를 어떻게 보면은 개인 개인의 학문의 자유 측면에서는 충돌하는 부분이 있기 때문에 이 부분에 대해서는 뭔가 시정 조치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이제 제 생각이라고 제 생각입니다. 그래서 이제 제가 생각하는 제도 제도 개혁 방안과 대안 부분을 이제 설명을 드리겠습니다. 일단은 사립학교 부분에 사립대학교 부분에 대해서는 이거는 일종의 사적 자치가 작동하는 부분이고 국가 공권력이 개입하는 측면이 굉장히 어렵습니다. 그래서 제 생각은 국립대 및 국가 예산이 지원되는 기관의 교원 임용에 대해서는 예를 들어서 교원 추천 교원 임용 위원회나 추천위원회가 있을 때 해당 학교와 연고가 없는 중립적인 추천 위원이 필요하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이 제도도 사실은 제가 제안을 했지만은 실제 실제 현실화되기가 어렵습니다. 왜냐하면 아까 제가 말씀드렸던 학문의 자유 측면에서는 분명히 뭐 헌법 소원도 하고 그 거기에 대해서 행정 소송도 다투고 하면 굉장히 저항이 심할 거라고 생각이 되고요. 그래서 만약에 이제 두 번째 대안으로 생각한 거는 정부가 연구 기금 같은 걸 내서 환단고기든 다양한 역사 연구에 지원이 될 수 있도록 대학의 석좌 교수나 이런 거를 제안을 하는 겁니다. 그렇게 되면 그 대학에서 선택을 할 수 있으니까 그 부분에 대해서는 아까 첫 번째 방안보다는 충돌하는 부분을 조금 더 피해갈 수 있다. 그리고 더 가장 현실적인 방향은 지금 현재 한국과학중앙연구원과 동북아 역사재단 이런 국책연구기관이 설치돼 있습니다. 여기는 거의 100% 세금이 투입된다고 보시면 됩니다. 근데 제가 이번에 발표를 준비하면서 여기 이제 그 홈페이지에 각 방문을 해가지고 환단고기라는 걸 검색을 해봤어요. 검색을 해보니까 안 나와요. 이렇게 국민 세금이 들어간 이런 재단이나 연구기관에서 환단고기에서는 연구가 자체가 없습니다. 하나 딱 동북아시아 역사재단에서 검색이 됐는데 그 주제가 환단고기는 위서다 비판하는 내용이야 유일하게 검색된 게 그러니까 지금 심지어 국민 세금으로 운영되는 국책연구기관에서도 사실 보통 주류 사학계라고 제가 아까 비판했던 이런 사람들이 다 중요한 자리에 가 있으면서 사실상 어 환단고기에 관련된 역사 연구를 제한하고 있는 이게 엄연한 현실이다. 그래서 이 부분을 직접적이지만은 바로잡을 수 있는 어떤 계기가 필요하다는 점을 말씀드리고요. 그리고 해당 정책이 실현될 수 있는 시민사회 공론화는 지금 이 자리에서 지금 하고 있는 겁니다. 지금 하고 있으니까 이 부분은 중요하지만은 계속돼야 된다는 말씀을 드리고 싶습니다. 예 그리고 이제 결론 부분을 말씀드리겠습니다. 결론 부분은 제가 생각을 하다가 그 4년 전인 것 같은데 당시 이제 미중 정상회담 회담을 했었죠. 그때 시진핑 중국 국가주석과 그 당시 트럼프 대통령과 미중 정상회담을 했는데 트럼프 대통령이 후에 이제 그 정상회담에 있었던 일을 전언을 하면서 당시 시진핑 국가주석이 한국은 역사적으로 중국의 속국이다 이런 말을 했다고 다 언론에 보도가 됐잖아요. 그래서 저도 이제 그 말을 듣고 한편으로는 되게 놀라면서도 이게 중국 역사 최고 지도자들은 으례 이렇게 역사적으로 접근을 하는구나 이런 생각이 들었거든요. 근데 이거는 제가 왜 이제 이 에피소드를 넣었냐면은 어떻게 보면 역설적으로 우리가 본받아야 될 상황이다. 여러분은 뭐 잘 아시는 분도 있겠지만 중국 공산당에 중국을 건국했던 모택동 그리고 그 같이 당시 중국을 통치했던 주은래는 거의 역사학자 수준으로 역사 지식이 많은 사람이었어요. 당시 북한 외교 대표단을 놔두고 당시 예전에 만주 지방의 고대 국가 그리고 우리가 만주 지방은 원래 우리보다는 조선 너희하고 더 관계가 많은데 지금 우리가 어떻게 어떻게 됐다 이렇게 말할 정도로 역사 지식이 많은 사람들이었다는 거죠. 그리고 후진타오도 예전에 이게 보도된 건 아닌데 그 정도의 역사 지식이 있었다고 해요. 그럼 이게 무슨 말이냐 하면은 중국의 최고 지도자들은 자기들의 국익을 위해서 할 수 있는 최대한의 역사 인식을 하고 있어요. 자기 중국 중심의 그리고 그거를 대외적으로 외교 정책에 반영을 하고 있다니까요. 근데 지금 우리가 우리나라 역대 대통령들을 보면은 과연 지금 제가 말씀드린 그런 중국의 이런 지도자들처럼 어떤 우리 중심의 역사 인식을 가지고 외교 정책을 만들거나 한 게 있느냐 저는 잘 생각이 잘 안 나거든요. 그리고 너무 또 잘 모른다 무지하다 이런 생각이 들어요. 근데 이게 왜 중요하냐면은 그런 최고 지도자의 어떤 어떤 생각 그보다 못해도 그 밑에 있던 어떤 소위 말하는 권력이나 권한을 가진 사람들의 생각이 지금의 이런 난국을 타개할 수 있는 가장 빠른 길이라고 생각됩니다. 아까 제가 분명히 동북아 역사재단 심지어 정부 100% 세금으로 운영되는 그런 기관에서도 지금 이상한 일이 계속 수십 년째 일어나고 있잖아요. 이거는 그거를 바로잡을 수 있는 정치 세력이 정권을 잡든지 아니면은 우리가 그런 분들을 만들어서 이렇게 하든지 그게 굉장히 사실은 현실적이고 중요한 접근 방법 중에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점을 말씀드리고 오늘 그걸 결론으로 해서 제 발표를 마치겠습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