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에서 가(家)는 가정이 아니다

예전에 대학 운동권들에게 보수적인 인간들이 하던 비난중 하나가 ‘가족(즉, 보수적인 부모님)도 설득 못하면서 무슨 세상을 바꾸겠다고 운동을 하냐’ 하는 것이었습니다. 이 때 동원되곤 했던 구절이 수신제가치국평천하 (修身齊家治國平天下) 입니다.

학생들의 소박한 도덕심을 겨냥한 비겁한 비난이었습니다. 대학생인 자식을 어린애로 여기는 보수적 부모님을 1:1로 설득하는 건 집단적 투쟁을 건설하는 것보다 오히려 훨씬 더 어려운 일인데 말입니다. (러시아 혁명가인 트로츠키도 혁명이 성공한 후에나 지주였던 아버지를 설득할 수 있었죠.)

그런데 저는 저 비난 자체가 구절에 대한 심각한 오독에 기반한 것이라는 이야기를 해보려고 합니다.

전자본주의 시대 가(家)는 오늘날의 가정이 아닙니다. 고대와 중세 정치의 기본 단위인 가문입니다.

이 구절이 나오는 유교 경전인 《대학》은 공자의 제자인 증자가 쓴 것으로 알려진 것을 송대 주희(“주자학”의 그 주자)가 다듬은 것입니다. 다시 말해 어떻게 하면 “평천하”를 잘 할 수 있는지 당대의 엘리트들에게 가르치는 글이었습니다.

이 때 가문은 단순한 사적 영역이 아니었습니다. 가문은 정치의 기본 단위이자, 국가 질서의 기본틀을 보여 주는 곳입니다. 그래서 가문의 질서(부자, 부부, 형제 등)를 잘 잡아야 이를 바탕으로 국가를 잘 다스릴 수 있다고 한 것이죠.

이런 이데올로기에는 동시에 실용적인 측면도 있었을 것입니다. 정치를 제대로 하려면 가문을 휘어잡아 이들을 활용해야 한다는 것이죠.

예컨대 삼국지의 조조를 보면 가문을 배경으로 군벌로 일어섰고, 중앙 권력에 오른 뒤엔 조인, 조홍 등 조씨와 하후돈, 하후연 같은 자기 가문과 친인척을 중용했습니다.

그래서 오늘날로 치면 가(家)는 가정보다는 정당이나 운동단체에 가깝습니다. 전자본주의 시대에는 지배계급의 가문이 정치의 기본 단위였지만 이제는 더이상 그렇지 않기 때문입니다.

자본주의 들어 지배계급 가문의 기능은 정당으로 재편됐습니다. 정치와 경제도 분리돼 지배계급이 모두 공식적인 정치 영역에 참여하는 것도 아닙니다. (그 나름의 “정치”를 하겠지만 말이죠.)

더욱이 전자본주의와 달리 오늘날은 피지배계급도 활발히 정치에 참여합니다. 정당이나 노동조합, 운동단체 등을 통해서 말이죠. 이들에겐 원래부터 가문 같은 건 없었습니다.

이들은 자신들이 목표하는 “치국”을 위해 자신의 정치 조직을 우선 잘 운영해야 하겠죠.

사실, 다양한 정치 조직이 다양한 대안을 목표로 하는 오늘날 자본주의 사회에서 전자본주의 시대 “평천하”를 목적으로 하던 “제가” 같은 논리를 그대로 적용하는 것 자체가 그다지 맞는 것은 아닙니다.

자본주의 하 해체돼 가던 노동계급 가족이 지배계급에 의해 의도적으로 재건되면서 사회 질서를 유지하는 보수적 역할이 부여됐다는 점도 덧불일 수 있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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