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이비 종교(?)의 유인물을 보며 진정한 종교를 생각하다

지하철에 문에 유인물 하나가 붙어 있었다. 슬로건이 눈길을 끌었다.

기다리지 마십시오!!

접은 채 뒤집었을 때 보이는 문구도 효과적이었다.

죽음은 자연의 섭리가 아닙니다.

절대 예정되어진 대자연의 섭리는 처음부터 “영원한 생명”이었습니다.

기다리지 마십시오!!

이제 “영원”으로 가는 밝은 길을 제시해 드리겠습니다.

02-337-99**

죽음은 자연의 섭리가 아니다, 원래는 “영원한 생명”이 예정돼 있었다. 호기심을 자아냈다.

흥미로운 주장이 이어졌다.

[암 환자만 시한부 인생인 줄 알지만] 사람은 누구나 시한부입니다. 다만 언제 죽을지 모르는 시한부인지라 그저 잊고 생각없이 살아갈 뿐입니다.(중략)

오랜 세월 헤아릴 수 없는 사람들이 죽어가는 생명을 영원한 생명으로 바꾸기 위해 길을 찾고 또 찾았습니다.

우린 그 길을 “도(道)”라고 부르거나 혹은 “구원” “해탈”이라고 불렀으며 그 길을 걸어간 사람들을 “성인(聖人)”이라 불러왔습니다.(중략)

동양과 서양, 과거와 현재를 막론하고 어느 종교, 어느 종파 어떠한 경서에도 반드시 기록하여 전하고 있는 가르침…

그것은 “기다림”입니다.

(중략) 2000년을 기다렸습니다. 3000년을 기다렸습니다.(중략)

그런데 너무나 오랜세월 기다린 탓에 이제는 뭘 기다려야 하는지 무엇을 기다려야 하는지 언제까지 기다려야 하는지도 모두 다 잊었나 봅니다.

오실 분을 기다리라 했건만 자기들이 가서 만난다며 이렇게 말합니다.

“구원? 그거 죽어야 받는 거야…”
“천국? 그거 죽어야 가는 거야…”
“구세주? 그분은 죽어야 만나는 거야…”

어떤 사람들은 이미 죽고 없어진 성인을 미화하여 신(神)으로 만들어 놓고 그 성인이 기다릴 분이었답니다.

이 뒤가 압권이다.

죽음으로부터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분을 어찌 세상에 없는 죽은자 가운데서 찾고 계십니까.

세상을 구원한다는 그분을 세상이 아닌 어찌 죽은 저승에서 만난다 하십니까.

종말론

이 유인물이 “이제 그만 기다려도 됩니다!! 이미 기다리던 그분께서 세상에 오셔서 생명 완성을 놀라운 역사를 이루고 계십니다” 따위 사이비 결론으로 빠지는 거야 그렇다 쳐도, 바로 앞부분까지의 통찰은 종교의 약점을 잘 찌르고 있다.

불교는 잘 모르겠지만, 기독교에 대해서는 조금이나마 지식이 있는 나로서는, 이 유인물이 아주 흥미롭게 느껴졌다.

성경을 꼼꼼히 읽어 본 사람은 알겠지만 2000년 전 예수는 이렇게 외쳤다.

회개하라! 때가 가까이 왔다!!

곧 종말이 오니 빨리 회개하지 않으면 안 된다는 메시지다.

그래서 예수의 제자들은 재산따위 필요 없고 종말을 예비하라고 가르쳤다.

바울도 자신이 죽기 전에 예수가 재림할 거라 믿었다. 때문에 결혼 같은 것도 별로 중요하게 생각하지도 않았다. 요한이 그렇게 생생하게 일곱 교회에게 계시록을 써서 보냈던 것도 바로 곧 종말이 올 텐데 로마의 박해에 굴복하면 안 된다는 메시지를 전하기 위한 것이었다.

그런데 예수의 제자들이 늙어 죽기 전에 올 것이라 철썩같이 믿었던 예수는 제자들 1세대가 지나도록 오지 않았다.

2세대가 지나도 오지 않았다.

예수의 제자들은 곧 종말이 올 것이니 굳이 재산 같은 것을 모으지 않아도 된다고 생각하고 공동체 생활을 했다.

그런데 100년이 지나도 예수는 오지 않았다. 이것이 초대 기독교의 모순이었다.

기독교가 로마의 국교가 된 후, 이 모순은 “믿으면 죽어서 구원받는다” 하는 교리가 해결한다.

구원이 죽어서 오는 것이라면 현실에는 별로 영향이 없는 것이다. 성전에서 가난한 사람들을 대상으로 장사해 폭리를 취하던 자들을 채찍으로[각주:3] 내쫓았던 예수는 이렇게 평화적으로 재해석되었다.

예수의 한 예화는 부자는 무조건 지옥에 가고 가난한 사람은 무조건 천국에 간다고 가르친다. 부잣집 앞에서 음식 찌꺼기를 먹으며 살던 거지 나사로는 죽어서 천국에 갔고, 부자는 지옥에 갔다는 이야기인데, 부자가 어떤 죄악을 저질렀는지 나오지 않는다. 그저 부자이기 때문에 지옥에 간다.

물론 한국의 기독교는 거지 나사로를 돌보지 않은 죄를 저질렀다고 가르친다.

그러나 예수가 부자는 죄인이라는 취지로 한 말은 좀 곳곳에서 찾아볼 수 있다. 대표적인 게 부자가 천국가는 건 낙타가 바늘귀 들어가는 것보다 힘들다고 한 말이다.

부자인 게 죄라고 가르치던 예수가 “나를 믿기만 하면 빈부 불문 누구나 천국에 간다”고 온건하게 재해석됐다.

사이비 종교가 판치는 건

사이비는 주류의 그림자인 것 같다. 주류 종교에 내재돼 있다는 것이다. 앞선 유인물은 사후 구원과 영생이라는 주류 종교의 약점을 날카롭게 찌른다. 영생을 준다는 예수는 죽지 않았냐는 것이다. 그런데 자신은 살아있다는 것이다.

진정한 종교란 게 있다면

종교의 참모습이란 게 있다면 그건 초기 기독교의 모습이 가장 가까울 것이다. 바로 종말론적인 모습이다. (재림예수를 자칭하는 것은 물론 사기다.)

예수는 매우 실천적인 방식으로 종말론을 설파했다. 가난한 사람들을 등쳐먹는 성전 상인들을 내쫓은 것은 그 절정이었다.

아마도 진정한 종교가 있다면 사회비판적 종말론을 주장할 것이다. 그런 종교라면 아마도 매력적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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