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금 <시사인>은 작가 조정래의 이야기를 연재하고 있다.

지난 호 인터뷰는 “내 인생 정리한 유서로 봐도 좋다”라는 제목이었다. 조정래의 자전적 에세이 <황홀한 글감옥>에 대한 소개가 주된 내용이었고, 현 정부에 대한 평가 등등 여러 가지 내용이 있는 인터뷰였다.
여기서 글감을 하나 얻었다. 시민단체의 독립성에 관한 조정래 선생의 이야기였다. 일단 그 부분을 전부 인용한다.
이명박 정부 출범 이후 시민운동이 크게 위축되고 있다는 지적이 끊이지 않는다.
노무현 정부 시절, 시민운동 단체가 정부의 지원을 받은 것이 잘못이다. 1980년대 민주화 세력이 시민운동으로 옮아간 것은 건설적 변신이었다. 시민운동은 국민이 회원이 되어 십시일반으로 도와야 한다. 그래야 정치·경제 등 모든 부문을 견제하고 감시할 수 있다. 어떤 경우에도 정부 지원을 받으면 안 된다. 정부 지원을 받는데 어떻게 정부를 향해 당당하게 비판할 수 있겠는가. 정부는 지원해주면서 시민단체를 이용하려고 한다. 내가 정권을 잡는다고 해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우리 작가들이 당당한 것은, 내가 책에도 썼듯이 정부 지원을 받지 않기 때문이다. 시민운동이 위축된 책임은 현 정권보다는 우리 시민 모두에게 있다. 시민단체가 개성적이고 주체적인 활동을 하지 못할 때 정치권과 경제 세력이 얼마나 횡포를 부리는지 우리 모두 자각하고 다시 만들어내야 한다. 그럴 때가 되었다고 본다. 우리가 뒤에서 불평할 게 아니라 시민단체를 위해 1000원, 2000원씩 내야 한다. 지난 10년 동안 우리는 너무 단순하고 순진했다. 혁명만 피를 먹고 자라는 게 아니다. 민주주의도 피를 먹고 자란다. 나는 이 시대를 함께 살아가는 작가로서, 또 시민으로서 시민단체를 후원한다. 이것은 우리가 실천해야 할 최소한의 의무다.
강조는 내가 한 것이고, 앞에 소개한 기사에서 인용한 것이다.
일단 조정래 선생은 시민단체를 후원하자는 의도를 덧붙여 말했다. 적극 동의한다. 하나라도 후원하자. 1만원 정도면 시민단체 하나를 후원할 수 있다.
국가로부터의 독립
시민단체는 국가의 보조기구인가 아닌가. 쉽게 답할 것이다. 아니라고.
그러나 현실은 복잡하다. 김대중, 노무현 두 정권 사이에 시민운동은 장관을 여럿 배출했다. 시민단체들 중 일부는 노무현 정부의 싱크탱크 역할을 했다. 정권에 너무나 밀착했다. 그래서 조정래 선생의 지적이 타당하다고 본다.
“시민운동이 위축된 책임은 현 정권보다는 우리 시민 모두에게 있다.” 단, ‘우리 시민 모두’는 아니라고 생각한다. 시민단체들에게서 일차적 원인을 찾아야 하지 않을까.
물론, 그렇다고 해서 이명박 정부의 시민단체 탄압이 정당화될 수는 없다.
국가와 자본, 그리고 재정의 독립성
자본주의 사회에서 돈은 중요하다. 시민단체는 자본주의 사회에 있는 단체다. 그래서 돈이 중요하다. 당장 이명박이 시민단체의 돈줄을 죄어 오자 참여연대 같은 대형 시민단체조차 운영이 힘들어지고 있다.
물론, 정권이 압력을 넣어 돈줄을 끊은 것은 포악한 짓이다. 비난받아 마땅하다.
그런데, 한 가지 염두에 둬야 할 점이 있다. 국가와 자본은 어떤 존재인가 하는 점이다. ‘시민’들을 대변하는 기구가, 재정을 누구에게 끌어다 쓸 것이냐를 생각할 때, ‘저쪽 편’에서 끌어오면 안 된다.
국가와 자본은 ‘저 편’일까 ‘이 편’일까. 국가와 자본은 시민단체를 통해 ‘만인의 평등’을 실현하고자 하는 기구일까, 아닐까.
온건하게 말해서, 우리 사회에서 “아직은” 아니라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국가와 시민단체의 방향이 충돌하는 상황에서, 시민단체가 국가의 돈을 끌어다 쓰며 재정의 상당부분을 의존하는 것[각주:1]은 분명 문제가 있었다.나는 아예 안 받는 게 가장 좋다고 생각한다. 조정래 선생도 그렇게 말해 반가웠다.
가장 온건하게 말한다고 해도, 국가에게 재정의 상당부분을 의존한 것은 “성급했다”고 말할 수도 있겠다.
국가와 자본에게서 나오는 돈에 재정의 상당부분을 의존했기 때문에 지금과 같은 결과, 정권이 돈줄을 끊자 시민단체 활동이 어려워진 상황이 빚어진 것이다. 당장 박원순 이사는 하나은행이 계약을 파기하고 지원을 끊었다고 폭로했는데, 정권이 압력을 넣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자본은 일단 돈을 지원한 것 자체가 자신들의 포장을 위한 것이었겠지만, 더더군다나 국가의 압력에 취약하기 짝이없다.
시민들의 지원은 그렇지 않다. 정권이나 자본의 압력보다 훨씬 더 가치지향적인 후원이며, 탄탄한 후원이다. 이런 후원이 운영에서 높은 비중을 차지해야 한다. 이상론으로 들릴 수 있겠지만, 그렇지 않으면 활동의 정당성 자체가 위협받기 시작한다.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후원을 받은 결과 더 나은 세상을 못 만들게 되는 아이러니가 생겨나는 것이다. 자동적이고 즉각적인 것은 아니지만, 정권과 자본의 후원은 장기적으로 이런 영향을 끼치게 된다.
근본적 한계도 있다
자본과 제휴한 대안 중 대표적인 것은 공정무역이 있다. 그런데 공정무역 등의 자본과 제휴한 대안은 한계가 있을 수밖에 없다. 자본은 이윤추구라는 대전제 위에서 이런 일을 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결국, 기업과 제휴한 대안은, 근본적 해결책은 못 되면서 때때로 ‘포악한’ 자본에 ‘진보적’ 포장을 해 주는 걸로 이용만 당할 뿐이다.
조금 거친 도식화일 수도 있다고 생각하지만, 장기적으로 볼 때 이런 추세로 나아간다고 나는 본다. 공정무역 자체에 대해 논한 것으로 다음 기사를 참고하면 도움이 될 것이다 : 공정무역이 제3세계의 빈곤을 해결할 수 있을까?
국가와 자본
마르크스주의는 국가를 자본의 대표기구로 본다. 애초에 마르크스는 자본이 국가를 지배한다는 투로 말했지만, 마르크스 이후의 마르크스주의는 국가에 대한 더 섬세한 분석을 발전시켰다.
물론, 국가에 대해서는 여러 이론이 있다. 시민단체들이 주되게 생각하는 국가의 상은, ‘권력기구라서 부패하기 좋지만, 감시와 견제를 통해 더 나아질 수 있는 기구’ 정도인 듯하다. 많은 사람들이 공유하는 생각인 것 같다.
마르크스와 엥겔스, 레닌과 트로츠키, 로자, 그람시 등이 발전시킨 마르크스주의는 이와 다르다. 국가는 자본을 대표한다. ‘대표한다’의 의미는, 자본을 대변하기도 하고 충돌하기도 한다는 의미다. 국가는 전체 자본의 이득을 위해 일부 자본을 규제하기도 한다. 한국에서 국가는 재벌육성을 통해 두 역할을 모두 드러냈다. 재벌의 이득을 봐주고, 재벌을 육성하면서 중소자본을 억압했다.
김대중, 노무현 두 대통령의 시대로 오면서 국가와 자본의 전략은 다소 달라진 듯하다. 여러 자본은 이미지광고를 활용하기 시작했다. 시민들의 권리행사가 늘어나면서 자본은 시민들을 신경쓰는 편이 좋다고 생각하게 된 듯하고, 그 대응으로 하나은행이 박원순 이사와 제휴한 식의 그런 마케팅 기법이 늘어났다. ‘공정무역’도 기업들이 실제로 공정하기 위해서 시도하는 경우는 적은 듯하고, 오히려 “공정무역을 통해 기업 이미지를 제고하면 수익이 증가한다”는 식의 설득이 더 난무한다. 그래서 대표적인 환경파괴 석유기업이 친환경이미지를 구축하는 데 이런 제도를 이용하곤 한다.
국가는 “자유방임”으로 자본의 뒤를 봐줬다. 김대중 노무현 시대에 민영화는 계속 진척됐다.
국가와 자본의 후원을 받는다는 것
국가와 자본은 계속 평범한 시민들의 생존권을 갉아먹었다. 그러면서 작은 것을 내줬다. 이 때 시민단체들이 국가와 자본의 후원을 받은 것은 이들에게 알리바이를 만들 수 있도록 제공한 것이나 다름없었다. “우린 최선을 다했어” 라고 말이다. 이것은 뼈를 주고 살을 얻는 거래였다고 생각한다. (NGO와 국가의 관계를 분석한 글로, NGO 정치를 추천한다.)
그래서 나는 자본주의가 지속하는 한, 시민단체가 국가와 자본에 후원을 받는 것은 위험하다고 생각한다.
최선의 경우라도 그것은 국가와 자본에 알리바이를 제공하는 것에 이용당하기 십상이고, 더 나쁜 경우에는 (노무현, 김대중 정부 시절 그랬던 것처럼) 한통속으로 매도당할 수도 있고, 최악의 경우에는 지금처럼 운영 자체가 어려워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답글 남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