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이 인민공화국을 대한 태도

이 글은 앞의 글(1945년 해방 직후 조선공산당의 계보)에서 밝힌 대로, 《해방정국과 조선혁명론》(해방3년사연구회, 대야출판사, 1988)의 2장(조선공산당의 변혁운동론)을 요약하면서 내 의견도 덧붙인 글이다.

③ 인공, 민전, 지방인민위원회

건국준비위원회(이하 건준)는 민족연합전선체였다.

건준을 좌익이 주도한 후 인민공화국(인공)으로 전환되는데, 인공은 “건준에 비해 명확한 계급적 지향점을 갖고 있었”다고 이 책은 평가한다.

△제주도에도 미군정이 실시된다. 내려진 일장기 대신 태극기가 아닌 성조기가 올라간다. / 제주도의 건국준비위원회 지부는 1945년 9월 22일 인민위원회로 재편성된다. / 출처 : http://jeju.cc/1886

그런데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은 인공을 승인하지 않았다고 한다.

이 책은 북한의 공산주의자들에게 친화적인 입장인 듯한데, 그래서 남한의 인민공화국이 “소수의 사람들에 의해 급조”되었다고 평가한다.

인공은 통인전선 수립을 위해 이승만, 김구와 협상을 벌이지만 모두 실패한다. 이승만과는 친일파 처리 문제 때문에 합의가 불가능했고, 김구와는 찬탁/반탁 문제로 갈라설 수밖에 없었다.

(이 책은 당시 조선공산당의 입장이 ‘모스크바 3상회의 총체적 지지’지 ‘찬탁’이 아니라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는 조선 문제만 논의한 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운명까지 함께 논의한 것이므로 ‘찬탁’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요약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내가 보기에는 말장난이다. 그럼 조선공산당은 신탁통치에 찬성했는가 반대했는가? 당연히 찬성했다. 그래서 찬탁이라고 부르는데 뭐가 문젠가. 내가 보기엔, ‘찬탁’이라는 입장이 조선공산당에 불리해 보이니 두둔하는 것으로만 보인다.](이 책은 당시 조선공산당의 입장이 ‘모스크바 3상회의 총체적 지지’지 ‘찬탁’이 아니라면서, 모스크바 3상회의는 조선 문제만 논의한 게 아니라 다른 국가들의 운명까지 함께 논의한 것이므로 ‘찬탁’이라는 이름으로 조선공산당의 입장을 요약하는 데는 문제가 있다고 말한다. 그러나 그런 논리는 회피에 지나지 않는다. 조선공산당이 신탁통치에 찬성했다는 것은 바뀌지 않기 때문이다.)

조선공산당의 통일전선 수립 노력은 민주주의민족전선 수립으로 이어진다. 조선공산당은 민주주의민족전선(민전)을 “진보적 민주주의 요소”로 구성된 통일전선이라고 규정하고 “파쇼적 경향을 배제한 민주주의, 민족 총통일체임을 선언”했다. 이 책은 조선공산당이 너무 협소한 부위만을 끌어들였다고 비판한다.

그러나 그보다는 계급연합적 인민전선 자체가 문제였을 것이다.

이 책은 조공이 미소협조를 너무 과신했다고 하면서도, 동시에 “임정이나 국민당 등의 중간파세력들 … 과의 연합은 필요했고 또한 가능한 일이었다”고 모순적으로 말한다.

아래로부터의 민주주의를 방치해 자멸한 인민공화국

처음에 미군정이 들어왔을 때 지방에 건준이 세워지면서 거의 이중권력에 가까운 상황이었다고 이 책은 말한다.

그러나 조선공산당이 미군정과 우호적인 관계를 맺으려고 애쓰면서, 미군정의 인공 지방위원회 공격을 방치했고 그 결과 조직적 대응 한 번 못 해보고 인공 지방위원회들이 모두 파괴당한다.

이 책은 올바르게 “지방인민위원회와의 유기적 연결이라는 중대사안을 방기함으로써 대중의 힘을 정치력화하는 데 실패”했다고 평가한다.

그러나 이 책의 결론은 그 힘을 통일전선 수립을 위해 사용했어야 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계급연합적 통일전선도 대안이 되지는 못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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