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유진 오닐의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극단 성좌)을 봤다.
대학로 소극장 연극들은 상업화돼 그런지, 흥미 위주의 극이 많고 작품성 있는 게 잘 없는 것 같다. 연극은 아무 거나 봐도 좋은 작품을 보게 될 확률이 높다고 생각했는데 이젠 아닌 것 같다.
그래서 구글 알리미에 ‘연극’과 ‘브레히트 연극’이라는 키워드를 등록해 이메일로 받아 보고 있다.
그 와중에 걸린 게 바로 이 <느릅나무 그늘의 욕망>이다. 노벨 문학상을 받은 미국 극작가 유진 오닐의 극이라고 하니 일단 믿어 보자 싶었다. 시놉시스도 나쁘지 않았다.
위키백과의 유진 오닐 항목(2011-09-30 기준)을 보면 이 희곡에 대한 설명이 나온다.
<느릅나무 아래의 욕망>(1924)
늙은 농부의 세번째 아내와 전처의 아들 간의 숙명적인 욕정을 둘러싸고 일어나는, 비극으로 긴박감이 넘치는 오닐의 원숙성을 보인 작품.
사실 이 희곡은 한 편의 막장 드라마다.
70대 노인이 30대를 세 번째 부인으로 맞이하고, 20대의 셋째 자식과 이 부인이 사랑에 빠져 파멸에 이르는 내용이다.
그런데 요새 워낙 막장 드라마가 많으니 이 정도는 막장으로 여겨지지 않는 것 같다. 같이 본 친구는 스토리가 뻔했다고 평했다. 그러나 나는 재미있게 봤다.
줄거리와 단상
(스포일러 주의)
세 주인공은 각자의 아픔을 가지고 있다. 즉, 뭔가 상실한 인간들이다.
셋째 아들인 에본은 15세 때 어머니가 죽었다.
어머니는 두 번째 부인이었고, 에본은 아버지가 어머니를 부려먹다가 죽음에 이르게 했다고 생각한다.
아버지의 농장은 사실 어머니 것이었는데, 그걸 빼앗기 위해 아버지가 결혼을 했다고 믿기도 한다.
극중 에본은 허공에 대고 “어머니 어디 계세요?” 하고 여러 번 대화를 시도하기도 하는데, 정신이 불안해 보인다.
에본은 배다른 형제인 형 둘이 아버지에게서 달아나 캘리포니아로 가겠다고 할 때, 300달러와 유산 포기 각서를 맞바꾸자고 제안할 정도로 약았다.
하지만 딱 그정도만 약았다. 아버지가 데려온 셋째 부인의 계략에 넘어가서 모든 걸 잃을 위기에 처하기도 한다.
아버지인 케봇은 완전히 미친 광신도다. 점잖은 말로는 독실한 청교도라고 한다. 하나님이 어느 날 어디로 가라고 해서 갔더니 세 번째 부인인 에비를 주셨다고 믿는다.
소유욕이 굉장해서 농장을 누구에게도 물려 주지 않겠다고 말한다. 죽는 날 자신이 죽을 때 함께 불태우고 싶다고 말하기도 한다.
에비가 아들을 낳자고 하자 매우 신나서는 꼭 낳자고 한다.
세 번째 부인인 에비는 어릴 때 고아가 되서 고생을 많이 했다.
첫 결혼한 남편은 술주정뱅이였고, 낳은 아기는 죽는다. 남편도 곧 죽어 자유를 얻는다.
그리고 또 고생하다가 케봇을 만나 한몫 잡기 위해 결혼을 한다. 에비는 농장을 상속받기 위해 케봇의 아들을 낳으려고 한다.
이들의 욕망과 사랑이 뒤얽히는 과정, 셋째 아들인 에본을 계략 속에 밀어 넣어 모든 걸 빼앗을 수 있는 데까지 이른 에비는, 그런데 역으로 사랑에 빠져서 그 계략을 모두 헛된 것으로 만든다.
케봇은 멍청하게 당할 뻔하다가 에비와 에본의 자중지란 덕에 살아남는다.
비극이라고 생각했는데, 친구는 “나름 희극”이라고 주장했다. 마지막에 어쨌든 에비와 에본은 사랑을 유지하기 때문이다.

느릅나무는 배경에 서 있는데, 별다른 역할도 상징도 하지 않는다. 원래 희곡에서는 어땠을지 몰라도 이 연극에서는 별로 비중이 없었다. 대사로도 별로 등장하지 않는다.
무대는 2층 구조로 돼 있어서 2층에서도 극이 진행됐다. 무대 앞쪽의 공간을 활용한 것도 흥미로웠다. 무대 안은 실내, 무대 밖은 실외였다.
자본주의에 사는 사람들의 물질적 욕망과, 그것만으로는 해소되지 않는 인간 간의 관계가 얽히는 것을 잘 묘사했다.
셋 모두 농장을 차지하려는 욕심에 불타지만, 또 아버지인 케봇은 늘 외롭다고 말한다.
에비는 처음엔 계략을 세워서 에본에게 접근하지만 실제로 사랑에 빠져 자신의 계략을 파탄낸다.
자본주의의 욕심만으로는 모두 설명되지 않는 인간 본연의 욕망도 있는 것이다.

우리 좌석은 측면 중간쯤이었는데, 평일 저녁이라 빈 자리가 많았다. 그래서 맨 앞으로 옮겨 가서 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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