투쟁을 선동하는 장이 되어야 할 국회

마르크스주의자들은 국회를 투쟁을 선동하는 연단으로 삼는다. 의원 신분을 투쟁을 돕는 데 사용했던 사례들을 살펴 본다.

그람시

그람시. 그는 혁명적 마르크스주의자기도 했지만, 국회의원이기도 했다.

이딸리아 자본주의의 발전은 국가가 농민대중, 특히 남부의 대중을 억압해왔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국가가 남부의 농민대중한테서 짜내는 거액의 세금은 북부 이딸리아에 자본주의의 기반을 만들기 위해 쓰여지고 있는 것입니다. 이딸리아의 자본주의 체제의 모순은 바로 이런 지형에서 형성됐습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억압적 법률을 만들더라도, 또 그 법때문에 커다란 조직을 만드는 게 어렵게 되더라도, 공동의 적을 타도하기 위한 노동자와 농민의 통합은 반드시 성사될 것입니다. … 우리는 이 연단에서 이딸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대중을 향해 이렇게 말할 것입니다. ‘이딸리아의 혁명세력은 결코 분쇄될 때까지 가만히 있지는 않을 것이다. 파시스트들의 혼탁한 꿈은 결코 실현될 수 없다.’

– 쥬세뻬 피오리, 《안또니오 그람쉬》, 435-436pp

나는 왜 이 말을 인용한 걸까? ‘이 연단’을 주목하기 바란다. 연단은 집회장 연단이 아니다. 국회 연단이었다. 그람시가 국회에서 한 말이다. 그는 국회를 반파시스트 투쟁의 도구로 활용했다.

무쏠리니는 발언 직후 국회 휴게실에서 그람쉬를 만나 연설을 잘 들었다고 칭찬하면서 악수를 청했다. 그람쉬는 내민 손을 냉정하게 무시하고 커피를 마시고 있었다고 한다.

– 위의 책, 436-437pp

영국 노동당

영국 노동당이야 갈 데까지 가서 미국의 하위파트너 역할을 자임하는 역할을 하고 있기야 하지만, 거의 100년 전쯤에는 멋진 구석도 있었다.

[영국 노동당이 집권한 지방정부인] 포플러 구청은 런던 전체의 지방세를 ‘평준화’할 것을 요구했다. 부유한 구들이 가난한 구들을 도와 줘야 한다는 것이었다. 그러나 로이드 조지 정부는 이 요구를 받아들이려 하지 않았다. 그래서 포플러 구청은 정부를 압박하고자 경찰과 구호시설 등에 지급해야 하는 교부금을 보류한 채 이 돈을 빈민 구제 사업에 썼다. 1921년 9월 이 불법 투쟁을 주도한 노동당 구의원 30명이 감옥에 갇혔다. 그러나 6주 동안의 구명 운동 끝에 그들은 석방됐다.

서영표의 《런던코뮌》 ─ ‘지방자치 사회주의’가 국가와 시장을 극복할 수 있을까?, 《마르크스21》 5호(2010년 봄호)

위 인용에서 강조는 내가 한 것인데, 강조한 부분이 압권이란 사실을 잘 알 거다. 진보적 당의 국회의원이라면 저 정도 깡은 있어야 하는 거다.

국회의원 김영삼

김영삼이 지금이야 별볼일 없지만 반독재 투쟁 시절엔 멋진 구석이 있어서 지지를 받았다.

1979년 8월 9일 가발 수출회사인 YH무역의 여성 노동자 172명이 서울특별시 마포구에 있는 신민당 당사에 찾아와 당내에서 농성에 돌입했으며 신민당 총재 김영삼은 YH무역의 여공들과 면담하였다. 20대 여성 노동자들이 근로조건과 처우 개선을 요구하며 신민당 당사에 진입하자 신민당 총재인 김영삼은 이들을 받아들이게 한 뒤, 이들을 위로하며 ‘여러분이 마지막으로 우리 신민당사를 찾아 준 것을 눈물겹게 생각한다’며 ‘우리가 여러분을 지켜주겠으니 걱정말라’며 노동자들을 안심시켰다.

1979년 8월 9일부터 8월 10일까지 신민당 총재 김영삼과 신민당 소속 국회의원들은 신민당 당사 주변을 순찰하며 박정희 정권이 보냈을 경찰청 정보과, 보안과에서 나온 형사들을 발견하면 멱살을 잡고 발길질을 하고 따귀를 치며 경고를 하였다. 8월 11일 새벽 경찰이 신민당에 최후통첩을 내렸다. 이순구 서울시 경무국장이 당사에 전화를 걸어 총재를 바꾸라고 당직자에게 요구했지만 김영삼은 건방지다며 전화를 받지 않았다. 오히려 작전지휘에 나선 마포경찰서장을 만나자 ‘너희들이 저 여공을 다 죽이려 하냐’며 뺨을 올려붙였다.

– 김영삼 의원 제명 파동, 위키백과(2012-03-04)

행위의 동기야 ‘모든 피억압자들의 호민관’이기 위해서는 아니었겠지만, 저런 행위가 나름의 멋을 가진 건 사실이다. 2004년에 민주노동당이 국회 입성한 뒤로 여러 차례 노동자 강경진압이 있었지만, 어떤 국회의원도 경찰 총책임자의 뺨을 올려붙인 적이 없었다.

유사한 사례는 있다. 한미FTA 통과에 반대한 김선동 의원의 ‘최루탄 의거’나 강기갑 의원의 ‘공중부양’이 그렇다고 할 수 있겠다.

버너데트 더블린

버너데트 데블린(Bernadette Devlin)이 북아일랜드에서 국회의원으로 선출됐을 때 그녀는 사회주의자 국회의원으로 행동했다. 그녀는 많은 시간을 할애해 전국을 돌며 노동자들에게 보수당에 반대하는 파업을 벌이라고 호소했다.

1972년 데리에서 ‘피의 일요일'(Bloody Sunday) 사건이 발생한 다음 날 하원의장은 그녀에게 발언권을 주지 않으려 했다. 그녀는 하원 회의장을 가로질러 가서 당시 내무부 장관이던 레지널드 모들링(Reginald Maudling)에게 주먹을 날렸다.

그렇게 해서 그녀는 TV 인터뷰에 등장할 수 있었다. 그녀는 자신의 의원 자격을 이용해서 북아일랜드 가톨릭과 영국의 북아일랜드 지배에 반대하는 사람들 모두의 분노를 대변했다.

21세기 마르크스주의: 의회를 통해 변화를 이룰 수 있을까?

내가 영국 노동당과 김영삼의 예를 들고, 그람시의 반 파시스트 투쟁 사례를 들긴 했지만, 뭐니뭐니해도 투쟁은 대중투쟁이 최고다.

사람들의 분노에 정당하다 말해 주고, 사람들의 행동을 호소하는 일이야말로 진정한 진보 국회의원이 해야 할 일일 것이다. 그리고 북아일랜드에서 21살에 사회주의자 의원이 됐던 버너데트 데블린은 그렇게 했다.

“피억압 대중 자신의 투쟁을 호소하기”

“중재하겠다”가 아니라, “국회에서 잘 다루겠다”가 아니라, “잘 협의하겠다”가 아니라, 바로 “함께 투쟁합시다” 해야 하는 것이다.

주체로 서라고 호소하기

“엄마는 더는 혼자가 아니다. 엄마도 대한민국의 당당한 노동자다. 엄마는 이제부터 밟아도 꿈틀대지 않는 무지렁이가 아니라, 나의 소중한 권리와 요구를 실현하기 위해 세상의 주인으로 살아가겠다.”

한일병원: “환갑을 넘은 제가 삭발을 결심하게 됐습니다”

노동자들은 스스로 싸울 때 힘을 자각한다. 법률 몇 개를 뜯어고치는 것만이 능사가 아니다. 권력자들은 있는 법도 지키지 않는다.

하지만 투쟁하며 깨어있는 노동자들을 권력자들은 무시하지 못한다. 법은 그 결과다.

그렇다면 더 나은 세상을 만들기 위해 피억압 대중 스스로가 투쟁하도록 도와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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